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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내가 태어난 아름다운 곳 "서울"

by 꽃피는 로박사 2020.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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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는 내가 태어난 아름다운 곳이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지나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어 인구가 너무 많이 늘어서 직장을 구하거나 사람이 생존하는데는 매우 편리한 점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한 군에데에 너무 많이 몰려서 살면 그만큼 부작용도 생겨나는 것이다. 도시가 발전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낙후된 과거에 얽매여 살 수는 없으며, 문명의 발전에 따라 사는 것이 인간사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면서 서울은 너무 비대해졌다.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여건은 너무 나빠진 상태다.

 

 그리움과 자연스러운 서울의 정취는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사람들의 인성도 옛날의 순박한 모습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경쟁하며 사는 환경이다. 사람이 똑똑해졌다는 표현으로 서울 깍쨍이라는 말이 서을의 대체적인 인심을 대변하고 있다. 서울은 살아가는 모든 환경이 변해서 인정이 메마른 세상이지만, 옛날 태고적부터 살아온 서울 토박이 분들을 만나면 세상은 변했어도 지난날을 기억하며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기본적인 인정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수유리 인수봉길을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서울의 여러 지역이 개발로 인해 도시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강남 지역은 박정희 3공화국 정부에 의해 신도시로 개발이 되면서 천지가 개벽하여 땅값이 치솟아 부자 동네가 되었다. 수유리가 과거에는 땅값이 강남 지역보다 더 비쌌다고 한다. 수유리가 좋아서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살아온 토박이 시민들은 지금 후회를 많이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강남과 강북은 아직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

 

 최근에는 수유리도 일부지역은 번화가가 생기고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은 아직도 자연의 모습이 간직하고 있어 내가 태어난 수유리 인수동길 부근은 더 이상 급격히 변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최근들어 지하철의 연결이 다양화 될 계획으로 있어 수유리도 변화의 물결을 비켜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수유리의 지명은 현재의 강북구 수유동의 1950년 이전의 명칭이라고 한다. 1914년 4월 1일 경기 도령 제3호에 의해 경기도 경성부 숭신명 대수유리. 가오리. 화계동을 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로 칭하였다.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으로 서울특별시에 재편입되고 신설된 성북구에 속하였으며, 1950년 3월 15일 서울 시구 조례 제10호에 의한 동명 개정 때 수유동이 되었다. 

 

 수유동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져 온다. 하나는 북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 마을을 넘쳤기 때문에 '물 수'(水)와 '넘칠 유'(踰) 자를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우리말로는 '물이 넘친다('[水踰]고 하여 '무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수유리와 인접해 있는 삼양동이라는 곳에 삼 형제가 살았는데 맏형은 바보이고, 둘째는 개구쟁이이며, 셋째는 두 형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이들 삼 형제는 힘을 합쳐 자기 땅을 확보하고자 싸움을 일삼고 다니므로 이 곳 주민들이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빨래골의 개울을 경계로 막았는데 그 개울물이 넘쳐흘러 수유리하고 했다고 하나, 주민들은 동명의 유래에 대해 전자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이가 많다.

 

 이곳의 전통 지명 중 가오리(加五里)는 조선 초기에 도성으로부터 10리 거리에 있는 지역을 조선 초기에 성저십리라 하여 한성부에 포함시킬 때, 이 일대의 지형이 10리를 정확히 특정하기 어려워, 5리를 더 간 곳에서 경계를 삼았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빨래골은 북한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맑아, 궁궐의 무수리들이 이곳까지 와서 빨래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화계 또는 화계골은 화계사가 자리 잡은 계곡을 꽃이 많다는 뜻에서 '꽃골[花溪 > 華溪]'이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지명으로 정착한 것이다. [내용 출처: 위키백과]

 

 지금의 강북구는 내가 알기로는 '위키백과'의 내용을 떠나 성북구 이후 도봉구에 편입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도봉구 이후 강북구로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나는 서울특별시 수유리에서 태어나서 태를 버린 제1의 고향이다. 다섯 살 때 춘천(봄내)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나는 아직도 네 살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네 살 때 형과 형들과 함께 대통령 후보이셨던 "해공 신익희 선생"의 묘역로 가다가 형들이 나는 떼어놓고 올라가버려서 나는 뾰족한 산돌에 이마 네다섯 군데가 뚫어지는 큰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리며 내려오다가 친할아버지가 나를 보고는 화가나셔서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 이후의 나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마음의 큰 상처를 입고 까물어친 나의 나의 이마를 꿰맬 때 그 광경을 보신 어머니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셨다고 회고하셨다. 많은 세월이 지나서 내 이마는 희미한 자국만 있을뿐 거의 흔적이 메꾸어조 사라져가는 상태다.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친할아버지의 심한 호통으로 사촌 형님들은 1년 동안 우리 집에 오지를 못했다고 한다.

 

 산촌 수유리는 그 당시 깊은 산촌이었으며, 초가집이었다. 우리 집 위에는 경진네라는 중령인가 대령인가 하는 군인 장교의 관사가 있었고 그 집에는 큰 진돗개가 있었다. 집 건너편에는 배우 고은아 님의 조카가 성악가로 시시때때로 부르던 아름다운 목소리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동네 전체를 휘감던 그 성악가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또한 소나기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날 중학교에 다니는 누님 3명이 갑자기 쏱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우리 집 안방으로 들어왔다. 내 어머니는 친절하게 중학생 누나들은 대해주셨다. 누나들의 배낭을 풀어놓고 삶은 계란과 사이다, 사과 등을 꺼내놓고 앉아서 대화와 웃음꽃을 피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내 나이가 네 살이었다. 그 중학생 누님들은 지금쯤 80세 정도된 할머니가 되어 살아있거나 일부는 하늘나라로 가셨을지도 모르겠다.

 

 산골짜기 폭포 아래에서 가재를 잡던 생각, 내 아버지가 이웃집 아저씨한테 벚나무를 주셨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버찌를 마음 놓고 따먹으러 이웃집 아저씨 집의 버벚나무에 올라갔다가 아저씨의 호통치는 소리에 놀라서 도망쳐 집 닭장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잠든 나를 어머니가 데려가셨던 기억, 새벽에 친할머니와 함께 알밤을 줍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닭장이 붙어있는 내가 살던 초가집과 밤나무, 오동나무, 바깥의 옛날 화장실, 집 앞의 펌프 등 모든 것을 연필로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모두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를 기억하고 그린 그림을 본 내 어머니는 무척 노란 표정을 지우셨다. 많은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많은 세월 떨어졌던 이산가족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히 먼 옛날 산촌 수유리 인수봉길 고향의 기억을 뒤로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들의 대부분을 봄내에서 살았음에도 나는 아직도 수유리에서의 다섯 살 때까지 살았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잊지 못한다. 어느날 약주를 한 잔 한 먹은 날이면,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고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라는 노래를 가끔 부른다. 사람도 연어처럼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회귀하고 싶은 본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3년 전 무더운 여름날 해공 신익희 선생의 묘를 찾을 목적으로 인수봉길을 올랐으나,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해공의 묘가 위치한 곳이 수풀이 무성하다고 한다. 여름날 더위가 기승을 부려서 숨이 턱턱 막히고 비를 퍼붓 듯이 땀이나서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다. 다음에 날짜를 잡아서 다시 찾아오겠노라 생각하고 인수봉길을 내려왔다.

 

 인수봉길을 내려오다가 어느 아름다운 빵집에 들려서 빵을 몇 개 샀다. 내가 사장님한테 말을 건네니까 사장님이 지난날 춘천(봄내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다고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막대기 빵 하나를 덤으로 주었다. 더 내려오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곰탕집에 들렸다. 연세 드신 여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서울 토박이라는 말을 들어서 무척 반가웠다. 언제 날짜를 잡아서 네 살 때 가보지 못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의 묘역을 찾아가서 참배할 생각이다.

 

 인수봉길은 번화한 서울특별시 안에 있는 어느 곳보다 아직도 공기가 맑고 조용한 곳이라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곳이다. 인수봉길에서 보는 도봉산은 늘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몇 년 전에도 수유리를 가끔 찾기도 했는데, 코로나 19 등 이런 저런 이유로 요즘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다.

 

 요즘 느끼는 것이 있다. 지난 날 서울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 당시 서울 사람들은 살기는 어려웠지만, 정말 순박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서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서 좋은 점도 있으나, 나날이 각박해져 가는 모습에서 서울의 진짜 모습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내가 태어난 서울을 아직도 사랑한다. 서울이여 언제까지나~

 

 나는 큰 가로수 거리를 무척 좋아한다. 10년 전 어느 날 저녁 서울에 출장을 갔을 때 큰 가로수 의자에 앉아서 대화하는 아름다운 두 아가씨와 멋지게 차려입고 거니는 멋진 미인 아가씨들이 거리를 멋지게 활보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 곳이 지금 어느 곳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봄내 서울 아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