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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꿈꾸는 나라, 춘천 "남이섬 & 나미나라 공화국"

by 꽃피는 로박사 2021.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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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번주 휴일을 맞아 몇 년 만에 남이섬을 다녀왔다. 지난주에 봄내에 눈이 와서 눈이 없어지기 전에 남이섬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남이섬으로 향했다. 코비드 19로 인해 사람들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코비드 19가 출현하기 이전의 보통 때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임에도 남이섬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주로 젊은 남. 여들,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 유모차에 아이를 모시고(?) 온 부부도 있었다. 엄마와 다 큰 아들과 딸이 온 가족도 있었다. 보기에 참 좋았다.

 그렇다. 춘천(봄내) 남이섬은 분명 특이한 관광지임에 틀림없다.. 몇 년 전에 갔을 때 많은 변화된 모습을 보았다. 요즘은 크게 달라진 것은 많지 않지만, 눈사람 모형, 전기 잎새, 눈동산 터널 등 일부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이섬은 특별하다. 특별히 잘해놓은 것은 없더라도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어떤 이유가 있어서 라기보다는  어느 날 문뜩 그냥 가보고 싶은 곳이 꿈꾸는 이상향의 나라, 남이섬의 나미나라 공화국이다.

 남이섬 남이나라 공화국을 운영하는 대표님이 "나마나라 공화국"을 세운 것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남이 장군의 일생이 그랬듯이 젊은 나이에 크게 출세해서 병조판서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역모로 인하여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에 대해 설화적으로 풀이한다면, 남이 장군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하고 죽은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시기와 역모가 없는 꿈꾸고 상상하는 새로운 이상향의 나라를 만들기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의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꿈도 이 곳에서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남이섬&나미나라 공화국에 가면 무엇인가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꿈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또 다른 이상향의 별나라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곳 남이섬에 오면 새로운 꿈과 희망을 꿈꿀 수 있을 거 같다. 

지도 크게 보기

* 남이섬&나미나라 공화국 홈페이지: namisum.com

 

나미나라공화국·남이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namisum.com

* 남이섬 지도:

1606871360남이섬리플릿한국어_겨울_201201.pdf
6.22MB

~~~***~~~

  강원도 춘천시 남이섬에 있는 남이장군(南怡 將軍)을 생각하면, 지금이나 지난날이나 역모 또는 당파 싸음으로 충신이 유배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 남이장군도 역모로 인해 27세의 나이에 국가에 충성한 공으로 병조판서에까지 올랐으나, 주변의 역모로 인해 끝내 죽임을 당한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늘 남이섬 입구에 들어서면 조선시대의 아픈 역사를 느낀다.

  당시 임금이 나약하고 정사에 능하지 못하였으며, 남이의 젊은 패기에 대립 관계에 있었던 한명회, 신숙주, 유자광 등 조정의 원로들의 말에 휘둘렸다고 볼 수 있다나라의 정사를 책임지고 있는 임금의 역할이 조정의 원로 세력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올바를 정사를 펼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 소에서 배우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남이 장군 [南怡 將軍]

정의/

조선 전기의 무신(武臣)으로,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자 민간과 무속에서 신앙되는 장군신의 하나. 17세 때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1467)의(李施愛,?~1467) 난을 평정하였으며, 예종 때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함.

내용/

남이 장군(14411468)이 비범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억울하게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은 남이 장군 신앙의 전승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이 된다. 비록 후대에 와서 신원(伸寃)이 되긴 하였지만 그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민중의 억울한 심정은 그를 신격화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역사 인식은 민간신앙과 구비 전승물을 통해 표출된다. 이를 토대로 남이 장군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남이(南怡) 장군의 신이한 출생

  남이장군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서 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조선 3대 임금 태종(이방 언) 넷째 딸 정선 공주가 의령 남 씨 남휘와 결혼하고 부친 남빈을 낳았다. 부친 남빈(南彬)은 조선 7대 임금 세조(수양대군)와는 고종 4 촌간으로. 지금의 군수 급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이장군은 태종 임금의 진외가 증손자 관계이다. 혼인은 세조가 7대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한 공신 권람의 딸과 결혼하여 명성을 떨쳤다.

2. 원조자의 도움으로 수련을 하다

  구비설화에 나타난 남이 장군은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출생에서부터 완전한 신성성(神聖性)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네의 혼이 환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지네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신 공희(人身供犧)를(人身供犧) 요구하는 부정적 존재이다. 수련 과정에서도 그의 불완전한 상태는 해소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지네의 원혼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수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비 차림의 길손[]이 남이를 데리고 가서 글과 무예를 가르쳤는데 수년 후 선비의 방에 비수를 든 사람이 나타나 선비의 가슴을 찔렀다고 한다. 비수를 든 사람이 바로 남이 장군이었다. 이처럼 그는 자신에게 신이한 능력을 지니도록 가르쳐 준 스승에게조차 칼을 겨누는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3. 신이한 행적을 남기다

  그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귀신을 알아보고 퇴치하는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또한 천명(天命)을 어기는 것이 되거나 결과적으로 구원자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으로 묘사된다. 신부를 죽이려고 하는 손각시를 퇴치하지만 사실 그 신부는 이미 천명을 다한 사람이었거나 귀신을 퇴치하고 살아남은 처녀가 남이 장군에게 자신의 여생을 바치겠다고 하지만 남이 장군이 이를 냉정하게 뿌리쳐 결국 처녀가 자결하게 된다는 식이다.

4. 원귀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다.

남이장군의 북정가(北征歌)

  세조 31453년에 나이 17세의 최연소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함경도 일대에서 터진 '이시애(李施愛)의 난'3개월 만에 평정하였고, 바로 이어서 만주 요동의 노략자 여진족을 '강순' 장수와 함께 출전하여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남이장군은 용맹하고 지혜로우며 기개(氣槪)가 보여 7대 세조(수양대군) 임금의 사랑을 받아 27세의 나이에 병조판서(兵曺判書) 자리에 임명되었다.

남이장군의 북정가(北征歌)

북정가 풀이

백두 산석 마도진 (白頭山石 磨刀盡) 두만강수 음마 무(豆滿江水 飮馬無) 남아 이십) 미평국 (男兒二十 未平國) 후세 수칭) 대장부 (後世誰稱 大丈夫)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갈마), (칼도), (다할 진), 飮(마실 음), 馬(말 마), 無(無(없을 무), (평평할 평), (누구 수), (말할 칭), (어른 장).

이 시는 남이장군이 백두산에 올라 지은 시다. 웅장하고 대담하며 기상이 넘치는 시이나, 이 시가 나중에 후환(後患)이 된다.

남이장군의 죽음

 남이장군이 27세 때의 일이다. 밤하늘의 혜성이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남이장군이 "묵은 것이 가고 새것이 나타날 징조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병조참지인 간신 유자광(柳子光)이 듣고 이 말의 뜻을 역모하기 위하여 장군의 담대하고 나라사랑의 기상을 나타낸 북정가(北征歌)의 셋째 구절 중 '미평(平) 국의 평평할 ()을 미득(得) 국의(得) 얻을 득()으로 고쳐 당시 조선 8대 예종에게 거짓 진언하여 나라를 차지하려는 "역모죄'로 몰아 1818년 병조판서 14개월 만에 참수(斬首)를 당한다.

男兒二十 未平國을 → 男兒二十 未得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 예종에게 거짓 진언하였다고 한다. 당시 예종은 유약(柔弱)하고 정사에 능하지 못하였으며, 남이의 젊은 패기에 대립 관계에 있었던 한명회, 신숙주, 유지광 등 조정의 원로들의 말에 휘둘렸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자신이 출세하려고 다른 사람을 음해하는 모사꾼이 있음을 평소에 늘 조심해야 할 것이다.)

참수(斬首)의 방법

  기록에 의하면 한강 가에서 두 팔두 다리 그리고 머리별처럼 5개 방향으로 우마차에 묶여 참수를 당했다 한다. 함께 여진족을 토벌한 강순(당시 영의정. 80)도 같은 날 함께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남이장군의 묘 (1973, 경기도 기념물 제13호)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낙향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710(숙종 36) 109일에 쓴 책 <남이장군 묘 제문>에> 의해 묘소가 확정되었다..

 <남구만의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하느니..

 그 후 400여 년이 지난 후인 1818(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관작(官爵)이 복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지금은 충무공 남이장군으로 부르고 있다.

* 위치: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천리.

* 묘소 입구의 길: 잘 정비가 되지 않은 소나무의 숲길.

* 묘의 모습: 묘소는 2단으로 쌓인 석축 대 위에 2개의 봉분이 있다. 봉분은 사성(沙城)으로 둘러싸였으며 부인과 쌍분으로 호석을 둘렀다. 묘비와 상석이 있고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배치되어있다.. 묘는 1973년 경기도 기념물 제13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이섬에 있는 장군의 묘는 가묘로 섬 이름의 의미를 부각해 장군을 기리기 위한 뜻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남이장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운명론적 결과로 그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도리어 민중의 변혁에 대한 강한 욕구의 표명이 된다. 남이 장군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를 향해 숭배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적 모순이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야기를 통해서는 그들의 영웅을 죽인 지배층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그를 신격화하는 것은 현실의 부조리나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민중의 역설적 저항의식의 표명을 나타낸다. 이처럼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저항의식은 남이 장군의 신격화에 관여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또 이것은 중부 지역 무속에서 최영(崔瑩, 13161388) 등을 비롯한 원한 깊은 장군을 신으로 받드는 맥락과 일치한다. 즉 생전의 위대한 업적이나 충정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억울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현상은 비단 남이 장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시에 원한 깊은 귀신을 모셔서 위해야만 살아 있는 자들에게 탈이 생기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금기 의식도 남이 장군의 신격화에 반영되어 있다. 또 민간에서는 남이 장군이 잡귀를 쫓아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생전에 위엄 있는 장군이었다는 점에서 잡귀를 쫓을 수 있는 주력(呪力)이 있다는 믿음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남이장군은 주로 서울 용산구에서 동제(洞祭)의 대상 신으로 모셔진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남이장군 사당제(南怡將軍祠堂祭)이다. 이것은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106번지에 있는 남이장군 사당에서 열리는 제의로, 199971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남이장군 사당은 대지 294에 건평 33이며 크기는 3칸으로 한와(韓瓦)이다.

 사당은 당 입구 전면에 있다. 이곳에 사당을 세운 이유는 남이 장군이 용산에서 병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화(慘禍)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사당은 원효로 2가에 위치한 거제산 당고개에 있었으며, 100여 년 전에 장군이 현몽해 현 위치로 옮겼다고도 한다. 당 내부에는 남이장군상을 비롯해 최영 장군상, 부군 대감 내외 상부군 대감 내외상, 정 추정 씨 내외상, 산신령상, 토지 신상, 천신 대감상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내용 출처

동신당. 김태곤. 민속원, 1999

한국 무속 신 고찰. 양종승. 몽골학 4. 한국 몽골 학회 한국 몽골 학회, 1996

[네이버 지식백과] 남이 장군 [南怡 將軍] (한국 민속신앙 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

한국 공무원문학협회.